나란히 잠든 두 아이들, 서로의 묘에 꽃 놓는 두 아빠
고 김연희, 고 김재강. 1999년생, 1994년생인 두 사람은 광주 영락공원 묘역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이들 모두 꿈을 향해 쉼 없이 달려왔고 목숨을 잃기 3개월 전 소망하던 직장에 들어가 이제 막 꿈을 펼치려던 참이었다. 첫 독립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한 두 사람은 지난해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나 고향 땅에 잠들었다. 슬픔의 공유 자식을 잃은 슬픔만으로도 부모의 삶은 충분히 버거웠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정부·지자체·경찰의 고위 관계자들은 책임 회피에 급급했고 심지어 잇단 망언과 2차가해가 쏟아졌다. 정부 주재의 유가족 간 소통은커녕 유가족들은 서로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유가족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 지원단체의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만남이 성사됐고 이후 '유가족협의회'도 꾸려졌다. 이 과정에서 연희씨 아버지 김상민(55)씨와 재강씨 아버지 김영백(61)씨도 광주 거주 유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각자의 딸·아들이 광주 영락공원 묘역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이후 연희씨 아버지는 재강씨의 묘에, 재강씨 아버지는 연희씨의 묘에 꽃을 놓기 시작했다. 어느 날 딸의 묘를 찾은 연희씨 아버지는 재강씨 아버지가 놓고 간 꽃을 발견했다. 벌써 여러 차례였다. 곧장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재강이 아버님. 또 우리 연희에게 꽃을 주셨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얼마 후 49재를 맞아 다시 묘를 찾은 연희씨 아버지도 똑같이 재강씨 묘에 꽃을 놓았다. "오늘 우리 연희 49재 지내면서 재강씨에게도 함께 헌화했습니다. 오늘 따라 눈이 많이 오더군요." "감사합니다. 마음도 아픈데 오늘 날씨도 고르지 못해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전체 내용보기

1999년생, 1994년생인 두 사람은 광주 영락공원 묘역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이들 모두 꿈을 향해 쉼 없이 달려왔고 목숨을 잃기 3개월 전 소망하던 직장에 들어가 이제 막 꿈을 펼치려던 참이었다. 첫 독립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한 두 사람은 지난해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나 고향 땅에 잠들었다.
슬픔의 공유

자식을 잃은 슬픔만으로도 부모의 삶은 충분히 버거웠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정부·지자체·경찰의 고위 관계자들은 책임 회피에 급급했고 심지어 잇단 망언과 2차가해가 쏟아졌다. 정부 주재의 유가족 간 소통은커녕 유가족들은 서로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유가족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 지원단체의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만남이 성사됐고 이후 '유가족협의회'도 꾸려졌다. 이 과정에서 연희씨 아버지 김상민(55)씨와 재강씨 아버지 김영백(61)씨도 광주 거주 유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다. 각자의 딸·아들이 광주 영락공원 묘역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이후 연희씨 아버지는 재강씨의 묘에, 재강씨 아버지는 연희씨의 묘에 꽃을 놓기 시작했다. 어느 날 딸의 묘를 찾은 연희씨 아버지는 재강씨 아버지가 놓고 간 꽃을 발견했다. 벌써 여러 차례였다. 곧장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재강이 아버님. 또 우리 연희에게 꽃을 주셨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얼마 후 49재를 맞아 다시 묘를 찾은 연희씨 아버지도 똑같이 재강씨 묘에 꽃을 놓았다.
"오늘 우리 연희 49재 지내면서 재강씨에게도 함께 헌화했습니다. 오늘 따라 눈이 많이 오더군요."
"감사합니다. 마음도 아픈데 오늘 날씨도 고르지 못해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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